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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세계사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역사 이야기

뉴탐스런 세계사 10강 강의를 들었습니다. 당나라에 이어 5대 10국이 있었고 이후에 송나라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송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공격을 받았는데 남송으로 옮기면서 한 수 물러났습니다. 이후에 몽골제국인 원나라가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며 정권을 잡습니다. 먼저 송나라에는 상류계층의 사대부가 힘을 발휘했고 수도는 카이펑으로 했습니다. 송의 태조 조광윤은 중앙집권을 강화해 황제권을 강력히 하려했는데 지방의 유력세력인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키고 직속 친위부대인 금군을 강화했습니다. 황제가 주관했던 시험은 전시를 실시하였습니다. 무력을 기반으로 하기보단 교화, 학문과 법령에 따라 정치하는 문치주의가 발전했는데요, 이는 관료의 비대화를 일으켰고, 무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아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는데 돈을 주어 공격을 무디게 하는 세폐지출이 많아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시절이 찾아옵니다. 이때 왕안석이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정책을 펼치는데 왕안석을 따르고 새로운 법을 주장하는 신법당과 그와 반대되는 구법당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구법당의 승리로 인해 왕안석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왕안석의 개혁을 살펴보면 부국으로 나라를 부하게 하기 위해 청묘 즉 영농자금을 대출해주는 것이 있었고, 모역 즉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이 있었으며, 시역이라 하여 상인에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이 있었으며 군수라 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강병책에는 보갑이라 하여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있었고, 보마라 하여 말을 키워 군사력에 보탬이 되려 하는것이 있었습니다. 왕안석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송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뤄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략에 더 활발히 대응할수 있었을텐데 실패해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송의 경제를 살펴보면 이웃나라 요나라와 금나라에 세폐지출로 타격이 있었지만 무역을 바탕으로한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유지될수 있었습니다. 농업과 같은 경우 양쯔강 하류에 쌀의 주생산지로 하였고, 모를 키워 본논에 이식하는 이앙법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파벼라 하여 잘 자라고 튼튼한 벼를 사용하였습니다. 지주전호제라 하여 땅 주인과 경작을 하는 전호가 연결된 토지소소유 형태가 발전하였습니다. 상업에서는 행이라는 상인조합이 있었고, 작이라는 수공업 조합이 있었습니다. 교자와 회자라는 화폐를 사용했고 무역을 담당하는 시박사가 있었습니다. 수공업에서는 석탄이 활발히 보급되면서 제철과 도자기 만드는 자기술이 발전하였습니다.


10강에서 캡쳐한 사진-송의 활발한 대외 교역


송의 문화를 살펴보면 사대부가 성장하면서 남송의 주자의 주자학인 성리학이 발전되어 인간의 본성과 이치를 배우고 가르치는 문화가 전파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년,월,일 순으로 편찬하는 편년체로 쓰인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있고, 서민문화로 곡예와 인형극 등이 있었습니다. 수도 카이펑을 그린 청명상하도는 경제가 발전한 송나라의 멋을 아주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 화약과 나침판, 활판인쇄술등이 발전했습니다. 화약의 발전은 전쟁무기로써 힘을 갖출수 있었을 것이며, 나침판의 발명으로 항해술이나 점성술등이 발전했을 것입니다. 활판인쇄술로 서적이 대량으로 나오면서 지식 보급이 원할해졌을 것입니다.


송을 괴롭혔던던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주요 거점지이었던 연운 16주를 송과 싸워 얻어내므로써 유리함을 가져갈수 있었고 전연의 맹약으로 송과 싸워 이긴 요나라는 송으로 부터 물자를 보급 받을수 있었습니다. 요나라에는 거란 문자가 있었고 이원 통치를 하였습니다. 북면관이라 하여 거란족은 부족제 형태로 다스렸으며 남면관이라 하여 한족은 주현제 형태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송과 금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요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은 남송과 화북지역의 금나라의 대결구도로 접어듭니다.


10강에서 캡쳐한 사진-요와 송의 영역(연운 16주를 차지하는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살펴보면 정강의 변을 일으켜 송나라 왕과 신하와 백성을 포로로 잡았으며 송의 수도인 카이펑 지역도 장악합니다. 이로 인해 송은 남송으로 위치를 옮겼고 금나라와 송나라는 군신관계를 맺습니다. 여진 문자가 있었으며 요나라처럼 이원 통치를 했는데 여진족은 부족제 형태로 다스린 맹안모극제가 있었고 한족은 주현제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금나라는 몽골제국, 원나라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13C 등장한 몽골제국 원나라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시절입니다. 칭기스칸으로 알려진 태무진은 제국을 건설하는데 부족제적 성향의 천호제가 있었습니다. 천명의 군사를 가르키는 천호제는 군사적 단위로 쓰였습니다. 칭기스칸의 아들 오고타이라 하는 태종은 금나라를를 멸망 시켰고 바투원정으로 러시아 남부지역과 헝가리 지역을 얻어내는데 이를 킵차크 한국이라고 합니다. 몽케 칸이라 불리는 헌종시절에는 이슬람의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아바스를 정복했는데 이를 일 한국이라고 합니다. 쿠빌라이 칸이라 하는 세조는 국호를 원으로 했고 대도 즉 베이징으로 천도를 했습니다. 1276 남송을 멸망시켰고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베트남 원정과 일본 원정을 했지만 베트남과 일본은 복속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귀족들의 사치가 있었고, 라마교 즉 티벳불교를 우대 하면서 어마어마한 불교행사가 있으면서 과도한 세금이 지출되 재정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초라는 화폐를 많이 찍어내는 우를 범하면서 물가가 상승했고 민족들을 차별하면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주원장의 명에 멸망하고 맙니다. 광대한 영토를 가졌다는것은 그만큼 전쟁도 많이 했다는 것이고 여러 이민족을 다스렸는데 이민족들의 불만과 반발이 언제나 있을수 있었으며 여러 문제가 있으면서 체제를 유지 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10강에서 캡쳐한 사진-몽골 제국의 광활발 영토


몽골제국 원의 경제 사회를 보면 몽골제일주의가 있어 몽골족이 관직을 독점하였고, 그 아래 계급으로는 색목인이 있었는데 눈 색이 다른 이방인을 재정이나 행정의 임무를 맡게 했습니다. 한족과 거란 여진족은 색목인 다음으로 대우했으며 남쪽의 한족 즉 남송인을 사회, 경제적 불이익을 받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원에 저항했던 남송인에 불만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한 몽골제의주의에서 나온 차별은 많은 반발과 불만을 만들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역참제가 있어 거점마다 정보의 전달과 교류를 활발히 할수있는 체제를 마련해 동서 교역이 활발했으며 목화 재배를 확대했습니다.


원의 문화를 살펴보면 라마교, 티벳불교가 성행하였고, 승려 파스파에게 문자를 만들라 하여 만들어진 파스파 문자가 있었습니다. 서민문화가 발전했는데 구어체 소설과 연극(희곡)인 서상기등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문화를 수용해 천문학과 역법, 수학을 받아 들였고 역법은 발전시켜 수시력을 만들었습니다. 동서 교류가 활발했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으며 이분바투타의 여행기가 있고 교황사절단인 카르피니도 찾아왔다고 합니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는데 이슬람교, 라마교, 경교, 카톨릭, 크리스트교등이 있었습니다. 세계사 강의를 듣고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명나라, 청나라, 근대 중국에 대해서도 집중해서 듣고 내용 요약 및 느낀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