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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세계사 중국의 역사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하여 내용 요약 및 느낀점

뉴탐스런 세계사 11강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명의 시대에는 사대부 보다 조금 조직적인 신사층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과거에 합격한 자나 전현을 관리했던 사람들의 모임으로 몸으로 치르는 노역인 면역에 대한 특권과 , 잘못을 했을때 책임을 회피하는 면책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태조인 주원장이 세운 나라로 태조는 홍무제라고도 불립니다. 홍무제는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재상제도를 폐지하여 행정과 군사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6부 직속은 조선시대에 태종과 세조가 시행했던 6조 직계제와 비슷한 제도로 높은 지위의 정승을 거치지 않고 곧장 왕과 대면하는것으로 황권 강화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과거제를 부활시켜 호족이나 귀족 권문세족들을 덜 등용시키고 유능한 새로운 인물들을 선출하였습니다. 효도와 충성의 내용이 담긴 육유 반포가 있었고, 110가구를 묶어 향촌 조직을 이뤄 안정을 꿰하는 이갑제가 있었습니다. 토지대장인 어린도척은 땅을 구분하는것이 마치 물고기 비늘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호적과 연관이 있는 부역황책이 있었습니다. 


태조 홍무제의 아들중 4째가 영락제인 성조인데 영락제는 자신이 왕이 되기전에 자신의 조카가 왕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망을 감출수 없었던 그는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방효유가 영락제를 비난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방효유의 10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3족을 멸하는 것은 들은적이 있지만 10족까지 멸했다고 하니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천도를 했으며 그 유명한 명소인 자금성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대운하를 보수했으며 자신의 업적을 알리는 것을 바랬던 그는 영락대전과 사서대전이라는 책도 편찬했습니다. 황제를 보좌하는 내각대학사가 있었으며, 환관 출신인 정화를 원정보내어 조공질서를 확립하려 했고, 화교들이 진출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공질서라 함은 상대방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을수 있는가를 정하기 위함인것 같고 화교들은 본국을 떠나 타지에 이주해 정착한 사람을 말합니다.


11강에서 캡쳐한 사진-정화의 항해(조공질서 확립을 위한)



하지만 명나라는 난관에 부딪히는데 북로 남왜라 하여 북쪽에서는는 몽골족 일파 다툼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왜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조선을 지원하면서 피해가 있었고,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군사적 지출이 증가하면서 재정은 약화되었는데 장거정이 개혁을 일으켜 토지를 측량하고 일조편법이라 하여 토지세인 지세와 인두세인 정세를 은으로 납부하는 것을 시행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금이 아주 귀하고 값어치가 있는데 명나라 시절에는 은이 대표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명나라는 차츰 국운이 기울다가 이자성의 난에 의해 1644년 멸망하고 맙니다.


명나라의 경제를 살펴보면 농업에서 쌀의 주산지가 양쯔강 중류가 됩니다. 송나라에는 쌀의 주산지가 양쯔강 하류이었는데 명나라에 와서 바뀝니다. 외래작물도 들어왔는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담배등이 있습니다. 수공업은 면직물과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양쯔강 하류에서 활발해집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같은 고향 사람끼리 조직을 만든것을 회관이라고 했으며 같은 직종에 사람이 조직을 만든것을 공소라 했습니다. 북쪽의 산시상인의 있었으며 남쪽에는 신안상인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무로마치막부와 감합무역을 했습니다. 일본사를 통해 무로마치막부와 감합무역에 대해 배웠던 일이 기억이 나는데 역사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아서 강의를 30강까지 다 본다면 많은 지식과 이해가 빨라지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나라 문화에 대해 살펴보면 성리학이 다시금 부활했지만 형식화 되면서 이와 반대되는 양명학이 발전하는데 마음이 곧 이치다라 말하는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주장했습니다. 실학도 발전했는데 기계에 대한 내용의 천공개물이 있었고, 약초에 대한 내용의 본초강목이 있었습니다.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있는데 마치 세계지도를 보는듯 했고, 마테오리치와 연관된 수학의 내용이 담긴 기하원본이 있습니다. 


11강에서 캡쳐한 사진-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상업의 발전



명나라 다음으로 청나라가 들어서는데 여진족이 세운나라로 후금이었다가 청나라가 됩니다. 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이며 태종 홍타이지가 청이란 국호를 썻으며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켰습니다. 남한산성이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아직 못 봤지만 시간이 되는데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임진왜란시절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감사함을 져버릴수 없었기 때문에 흔들리고 쇠하고 있던 명나라를 지지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크게 성장하고 앞서가는 청나라의 무서움을 생각해 청을 두려워 하고 낮은 자세를 가졌다면 병자호란이 안일어났거나 규모가 작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청나라는 강경책과 회유책 즉 당근과 채직을 병행해서 쓰는데 강경책으로는 만주족 풍습을 강요해 변발과 변복을 강요했으며 읽지 말아야할 책을 정하는 금서령과 문서에 적힌 문자의 내용이 황제나 체제에 대해 은근히 비판하면 숙청과 처벌을 하는 문자의 옥이 있었습니다. 회유책으로는 만주나 한인에 관계 없이 인재를 골고루 등용시켰으며 한족의 문화를 존중했고, 한족이 작성하는 대규모의 편찬을 통해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편찬된 책 중에는 강희자전과 사고전서, 고금도서집성 등이 있습니다.


11강에서 캡쳐한 사진-청의 영역,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



청나라의 황제 중 강희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삼번이라 하여 청의 지배하에는 있지만 조금은 자치적 성향을 가졌던 3지역인데 청의 통치에 불만을 표출하자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합니다. 타이완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국경선 협약을 맺습니다. 워낙 대규모의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황제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삼번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다면 청이 더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강희제 다음으로 살펴볼 황제는 옴정제인데 군사, 정무의 최고 기관은 군기처가 힘을 발휘했고 황권을 강화시켰으며 러시아와 청의 통상문제 해결및 몽골지역에 대한 국경 확정에 관한 캬흐타 조약이 있습니다. 지정은제를 실시하는데 청나라에 토지세인 지세는 걷는 대신 인두세인 정세는 거두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조편법처럼 은이 통용되었습니다. 지정은제로 인두세인 정세를 내지 않아도 되자 자녀들을 너 많이 키워 청나라는 인구가 아주 많이 늘어납니다. 인두세인 정세를 거두면 사람수많큼 세금을 내야 했지만 지정은제로 정세를 내지 않아도 되자 일어난 일인데, 인구의 수는 국력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청나라에서 지정은제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중국인구보다 적은 인구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알아볼 황제로는 건륭제가 있는데 청나라가 이 시절에 최대영토가 됩니다. 여러 종류의 종교적 농민 반란인 백련교의 난이 있었으며 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했고, 청프전쟁에서도 패배했으며, 청일 전쟁에서도 패배하고 맙니다. 청나라에 와서는 쌀의 주 생산지가 양쯔강 상류로 바뀌었고 문화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유명합니다. 예수회 선교회에 아담샬과 카스틸리로네가 청나라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고증학에 반대되는 현실 개혁적인 공양약이 있었는데 이는 사회 전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한 변법자강운동의 이론에 토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