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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세계사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이야기

뉴탐스런 세계사 9강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8강에서 들었던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어 유명한 삼국지의 위, 촉, 오 시대가 오고 진으로 통일이 됩니다. 진에서 북조와 남조로 갈리다 589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이 된후 얼마 가지 않아 당나라로 정권이 교체가 됩니다. 영화 안시성은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인 이세민과 겨룬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류성완 선생님께서는 조선의 당 태종과 당나라의 당태종 이세민이 어려모로 닮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공헌 했으며, 장남이 아니지만 왕권을 이어 받아 정치는 잘했지만 개인적인 개인사에서는 가까운 친족들이 죽음에 이르러 나은 평가를 받기가 힘들것 같습니다. 왕권강화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지금의 시대가 조금은 덜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 적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한나라 이후의 시대 수나라 이전의 시대를 위진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위진 남북조 시대 당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9품 중정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객관적인 판단하에 유능한 인물을 선출하기 위한 제도 이었습니다. 하지만 9풍 중정제를 실시하는 중정관들은 지방의 호족을 만나러 갔을때 유력 호족들이 미리 손을 써서 아주 극진한 대우와 정성을 들임으로써 객관전인 판단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력 호족들과 그의 자제들과 중앙으로 많이 선출되어 등용됨으로써 문벌 귀족화 현상이 발생합니다. 외척 세력이나 강력한 가문이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영화 명당에서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그 힘이 왕의 힘을 능가하는 정도라면 놀랍고 무서운 일인것 같습니다.


5호 16국-북위-동위-북제 or 서위-북주의 부북조에서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이민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불교를 장려했습니다. 윈강석굴이나 룸먼석굴과 같은 거대하고 화려한 불교 문화로 왕권이 살아 있음을 인지시키고 왕을 따르도록 하려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북조에 포함되는 북위와 같은 경우 한나라의 정신을 이어 받자는 한화정책을 썻는데 이민족이 중심이 된 북조의 북위는 땅을 나눠주는 균전제를 채택했고 호적조사나 세금징수를 하는 삼장제가 있었고, 이민족 복장인 선비복장을 금지했고, 이민족의 언어를 쓰는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북위가 유지 되지 못했고, 그 이후에 이민족들은 북위의 한화정책과 같이 한나라에 정신을 이어 받자는 사상을 채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진-송-제-양-진으로 이어지는 남조에서는 강남지역 즉 양쯔강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현실도피하는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음악과 술을 즐겼던 일곱명의 선비를 그린 죽림칠헌과 도가의 무위사상을 기본으로 하며 회의적 태도와 염세적 인생관을 담은 청담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 시골로 돌아와 세속과 결별을 선언한 귀거래사가 있었으며 글자수를 일정하게 배치하는 4-6 변려채가 있습니다.


위진남북조에 이어 수나라가 들어섭니다. 581년부터 618년까지 이어졌던 수나라는 589년에 통일을 합니다. 수 문제가 중국을 통일했는데 황제의 권한은 강화하고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행되고 있던 9품 증정제를 폐지시키고, 과거제를 실시합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 대해 알고 있지만 수나라의 과거제는 과거제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관리하는 균전제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어 채택되어지고 있었고, 부병제로 군사력을 강화했는데 군사가 필요한 상황에 징집이 될수 있는 제도입니다. 조용조라 하는 조세체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수 문제에 이어 수 양제가 왕권을 잡았을때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건설을 합니다. 113만의 고구려 원정으로 긴 이동 거리로도 많은 병사가 죽었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면서 국운이 약해졌고, 대운하 건설에는 무려 1억 5천만명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이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나라는 당나라로 교체가 되고 맙니다. 수 양제가 무리한 고구려원정과 대운하 건설을 하지 않았거나 규모를 줄였다면 수나라가 조금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나라의 진시황제도 만리장성을 건설하는데 막대한 재정과 사람을 썻는데 반란도 있었으며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민심에 귀기우리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란과 반대가 있을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9강에서 캡쳐한 사진-수나라의 영역과 대운하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들어섭니다. 618년에서 907년까지 유지되었던 당나라는 장안을 수도로 했고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했습니다. 한자와 율령, 유교, 불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권입니다. 당나라의 고조 이연은 당나라를 건국했습니다. 보통 태조 이성계, 태조 왕건 처럼 나라를 건국한 사람에는 태조라는 말을 붙이지만 당나라는 태조가 아닌 고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조에 이어 태종 이세민이 정권을 이어 받는데 체제를 정립합니다. 율령을 확립했으며 3성 6부를 도입하여 전 지역을 관리합니다. 대외적으로도 팽창하여 돌궐을 복속시켰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웠던 내용을 영화화한 안시성의 이야기 처럼 고구려도 정복시키기 위해 힘을 썻습니다. 태종에 이어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으며 베트남을 복속시켰습니다. 그 이후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양귀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경국지색이라하여 나라의 국운이 기울수 있을만큼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여자 문제가 있었지만 현종은 나라의 중흥을 위해 여러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비단길, 초원길, 바닷길등 유렵, 이슬람세력, 아프리카 등과도 활발히 교역을 했습니다. 아랍인과 싸웠던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 하면서 비단길을 상실했으며 현종 대신 실권을 쥔 재상 이임보가 양귀비를 조종해 독재정치를 하자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9C에는 황소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에 절도사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절도사를 대표하던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는 멸망당합니다.


9강에서 캡쳐한 사진-당나라의 국제 교류의 모습


당나라의 경제를 살펴보면 동일한 농장에 두 종류의 농작물을 1년중 서로 다른 시기에 재배하는 농법인 이모작을 했었고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 그 모를 본논으로 옮겨 싦는 이앙법이 시행되었으며, 마시는 차와 도자기가 유명했습니다. 행이라는 상인조합이 있었으며, 지금의 어음에 해당하는 비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시박사라하여 해상무역 관계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균전제에서 장원제로 제도가 바뀌었습니다. 장원제는 토지 소유자와 경작인인 농민간에 맺어진 지배, 예속 관계로 땅을 나눠주고 관리하던 균전제보다 조금은 불평등한 제도 인것 같습니다. 조용조라 하는 조세제도는 양세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사의 난으로 농민이 약화되고 재정에 문제가 생기자 여름 6월과 가을 11월에 두차례 나누어 세금을 양세법 하에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안사의 난의 영향으로 부병제는 모병제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모병제에 대해서도 거론이 되고 있으며, 향후에는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각 제도에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나은 제도라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앞으로  지켜봐야 될것 같습니다. 당의 문화는 귀족적이고 국제적이며 개방적이 었는데 외래종교인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경교, 이슬람교에 대해 큰 핍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훈고학이 발전했는데 오경정의를 쓴 공영달이 있고, 이백과 두보는 시로써 유명한 사람입니다. 불교는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고 쓴 대당서역기가 있으며 탑으로는 현장과 연관된 대안탑이 있습니다. 3색이 잘 조화된 당삼채도 유명합니다. 세계사 9강에서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국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어지는 강의도 잘 듣고 내용을 요약하고 느낀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