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물/영상자료

흥선대원군의 정치와 당시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EBSI 2020 수능특강 정선아 선생님의 역사 강의 제 13강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조선의 대응을 보고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10여년이란 세월동안 고종을 대신해 정치를 했던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 보려고 합니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60여년간 순조, 헌종, 철종이 왕을 이어받았습니다. 이 60여년은 세도정치기라고도 불리우는데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왕실외척등의 소수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비변사의 힘이 아주 강했습니다. 당시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매관매직을 통해 부정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매관매직을 하면서 생긴 자금적 피해를 백성을 수탈함으로써 만회하려 했는데 이를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뇌물은 안되는 일도 되게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현 시대에도 뇌물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은 정도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부정한 일이므로 되도록이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것 같습니다.


삼정으로는 토지세인 전정이 있고, 군인세인 군정, 봄에 곡물을 빌려주고 가을에 되돌려 받는 환곡이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는 땅은 토지세를 내지 않기도 했고 신분이 높으면 토지세를 안내기도 했으며 군정은 16세부터 60세까지 남자에게 거둬야 하는데 죽은사람이나 신생아에게서 군정을 걷기도 했다고 합니다. 환곡은 높은 고리대금이 붙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런 불만으로 봉기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고, 서양 열강들의 접근과 침탈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고종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빛을 내는 상황에 이릅니다.


웹사이트에서 캡쳐한 사진-흥선대원군의 사진


흥선대원군이 고종이 즉위한후 10여년간 정치를 담당했는데 우선 세도정치의 악습을 막기 위해 세도 가문을 축출했다고 합니다. 영화 '명당'에서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당시에 세도 가문의 힘이 정말 쎄고 강력하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서 배울수 있었습니다.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키며 나중에는 폐지시켰고 의정부가 본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무너진 틀과 규범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경북궁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과 자본을 사용하였으며 당백전의 도입으로 물가가 폭등하여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무리한 공사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 기다랗고 거대한 만리장성 축조를 예로들수 있습니다. 고된 노역과 불평등으로 민심을 잃으면 득이 되는것은 적고 해가 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이 파괴되었고 그것을 복원하여 의미를 가졌던 일이었던 것처럼 만리장성도 외세의 침입을 막는데 큰 역활을 했습니다.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옳지 못한 일이지만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맞는것 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쳤고 2번의 큰 양요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습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천주교도들을 조선에게 죽임 당하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났는데 돌아갈때 조선의 문화재가 많이 빠져 나갔다고 합니다. 신미양요는 미국과 싸웠던 것인데 제너럴 셔먼호가 공격 당했던 일을 빌미로 하여 미국이 강화도를 쳐들어왔는데 미국에 대항하여 싸워 결국 철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서양 열강과는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쓰지 않고 조금이라도 빨리 서양과의 교류를 했다면 빨리 문을 연 일본이나 청나라에 많이 뒤쳐지지 않았을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병인양요때 천주교인들을 너무 많이 죽음으로 이르게 했던 점은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선대원군에 대해 더 많은 자료와 정보를 찾아보고 배워나가도록 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