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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1강 일제강점기를 보고 내용요약 및 느낀점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흑역사이자 암흑기로써 기억될 역사입니다.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1강 일제강점기를 통해 내용을 알아봤습니다. 1910년대에는 일제의 통치 방식은 헌병경찰통지 즉 무단통치로 태형이 있었고 문제가 있을시 즉각처결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1910년대에 비중이 있는 부분은 토지조사업을 위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인데 일본과 한국이 연계해 만들었고 창립 위원 116명이 임명되었는데 일본어로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땅을 몰수 당했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은 땅을 잃었고 일제는 회사령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일제에 허가과 심사 없이 회사를 운영할수 없도록 했습니다. 이때에 제 1차 조선교육령이 내려 많이 배우면 일제의 지배에 나쁜 영향을 준다하여 6학년을 4학년 까지만 배우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종교는 대종교로 단군신앙을 바탕으로한 중관단에서 성행 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원불교 또한 대중화를 이뤄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1919년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날시점인데 이때 유관순을 필두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가 있었고 파고다공원에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라 하여 독립을 원하면 독립을 하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3.1운동을 했는데 이 해는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합니다. 유관순의 일대기도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배웠는데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안타까웠고, 여자이면서도 당당하고 용감했던 유관순에 존경심이 듭니다.


일제의 강경 대처로 이 운동을 실패로 돌아갔지만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삼권분립과 공화정을 체제로 하며 사료 편찬소와 독립신문을 편찬했습니다. 하지만 대표인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청원을 했는데 도와달라는 의미가 강해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서간도에서 갑부인 이화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썻고 북간도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북로군정서군을 설립에 일제에 대항하였습니다. 돈이 많았던 이화영은 당시 갑부들이 일제에 협력하는것이 반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력을 아낌없어 투자하며 나라사랑을 실천했고, 유명한 김두한의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도 나라를 위해 일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과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세력들은 나은 생활을 했지만 독립군이나 일반 백성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어려운 문제인것 같습니다. 협력을 하면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나라를 잊어버리고 배반하는 것도 큰 잘못이며, 독립군과 저항군으로 싸우는 것도 힘겹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것 같습니다.


강의에서 캡쳐한 사진



1920년대로 가면 일본은 군부가 통치하던 1910년대가 지나고 민주파가 정권을 잡아 유화적인 문화통치를 합니다. 헌병경찰통치에서 보통경찰제를 도입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1920년대에 창간되었다니 그 역사가 길고 전통이 오래 되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독립운동자를 저지 하려 했습니다. 조선어도 필수과정으로 돌려 조선어를 배울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회사령 또한 폐지되고 신고제로 전환되면서 많이 유화된 정책을 썻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우리나라에 더 나은 정책이 시행되었다고 하니 누가 정권을 잡느냐는 큰 문제인것 같습니다. 민주파 정권은 산미증식계획을 써서 조선인이 배부르고 잘 살게 하려고 농경지를 개간하고 개량했으며 확충해 나갔지만 본국 일본에 경제적 어려움이 있으면서 일본으로 쌀이 가면서 산미증식계획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문맹퇴치 운동이라하는 브나로드 운동이 퍼지면서 대중들과 함께 배우자는 의지가 있었고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유소년을 위해 일했으며, 여성인권을 존중하는 근우회가 있었고, 백정 지금으로 말하자만 도축업이나 정육점을 하는 사람들이 공평과 평등을 외친 형평운동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 국산품을 애용하여 일제의 탄압에서 이겨내 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만립대설립운동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대학을 세우려 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했고 일본은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어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 때 일본의 통치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광수의 자치론이 있었지만 민족의 자긍심을 낮추는 일이라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고종에 이은 순종의 장례식인 1926년 6월 10일에도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일본의 대처로 무산되었습니다. 광주에서는 광주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신간회가 만들어져 좌파 우파의 힘을 합쳐 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의열단은 일제에 강력히 저항운동을 했는데 김원봉과 신채호가 이끌었고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나석주는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독립전투로는 봉오동에서 홈범도 장군이 있었고,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져서라도 나라를 지키고 찾으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일본이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것을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강의에서 캡쳐한 사진



1930년대가 되자 다시 일본은 군부정권이 다시 정권을 잡았는데 초강경파로서 극우파이었는데 세계 경제 대공황이 오자 이를 극복하는것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합니다. 만일 경제 대공황이 오지 않고 나은 상황이 되었다면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전쟁은 정말 해서는 안되며 이기든 지든 양측모두 막대한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때에 전진 병참기지화가 되었고, 국가총동원령으로 남자는 징용되어 전쟁에 나가고 여자는 위안부로 전쟁에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때 내선일체를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뀌는 창씨개명을 하였고, 조선어를 쓰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황국신민 서사라 하여 일본의 황제와 일본을 찬양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어를 선택과목화 하면서 많은 이들이 조선어를 배울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지금의 초등학교는 국민학교라 불리며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절에는 강경한 시대라 독립운동이 잘 안되었고 조선어학회도 힘을 써보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역사학도 발전했는데 민족사관은 민족의 자긍심을 강조하는 신채호 박은식으로 대표되는데 이에 반하는 실증주의 사상과 대립을 겪었습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실증주의는 민족사관에 공격을 당했습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실증주의는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 조금은 나은 평가를 했기 때문에 민족사관은 실증주의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한인애국단은 김구가 주도했는데 일본천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이나 루쉰공원에서 일본 장군들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이 있었습니다. 대일 선전포고를 했던 임시정부의 윤봉길에 사건을 보고 중국이 감탄하여 한중연합전선을 통해 우리나라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의 진압으로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충칭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에도 건국강령을 내리고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일본에 대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