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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8강을 듣고 내용 요약 및 느낀점

조선은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도움으로 넘겼는데 조선의 이북에 후금 곧 청나라가 들어섭니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가면서 일본과의 외교를 회복하고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청의 누르하치가 왕위에 있을때에는 친 조선 정책을 펼쳤지만 홍타이지가 뒤를 이어 왕이 된 후에는 강경하고 극렬적으로 조선을 치려고 합니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를 거슬러 청나라와 가까이 지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성장하는 청을 무시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어느정도 실리가 있는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무리 현시대의 중국이 협력해야하는 중대한 나라이지만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맺어온 동맹과 협력을 버리고 중국을 따를수 많은 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인조에 왕위를 내놓은뒤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40일동안 항전하다 결국 항복하며 인조는 삼배구고두배를 했는데 조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인조가 청나라를 의식하고 조금은 굽히더라도 조심했더라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어려움이 줄어들었을것 같기도 해 아쉬웠습니다.


광해군은 조세 부과를 복적으로 만든 토지대장인 양안과 국민의 신분관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만든 호적을 복구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해 각 지역의 특산물이나 일정의 할당량을 내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창출하여 상품경제를 발달시켰습니다. 광해군에게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는 의심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의 아들로 임해군과 광해군이 태어났고, 영창대군은 다시 결혼한 인목대비의 적자로 태어났습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때 행실이 나빳다는 이유로 백성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광해군은 임해군이 왕위를 오르는데 있어 방해가 된다 생각해 죽입니다. 영창대군 역시 역모로 귀향지로 보내져 귀양지에서 방 온도를 높여 쪄 죽는 운명을 맞이 합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며 폐모살제를 하며 인심을 잃어가고 거기에 무리한 토목공사를 통해 궁궐에 대규모 공사를 5군대 진행시키며 무리하게 백성을 동원하며 백성의 원성을 듣다 인조반정 때 왕위를 인조에게 내줍니다. 광해군이 잘한 일도 있었지만 폐모살제는 정말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위를 위협받기 때문에 살려두면 후한이 된다고는 하지만 너무 아쉬운 판단과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 강의 8강에서 캡쳐한 사진



영조에 이르러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소극적적인 원론탕평을 실시했고, 군역법을 실시해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줄어든 재정을 안정화 시켰고, 하위 직책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조전랑의 권한을 축소 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조전랑이 아주 높은 직급은 아니었지만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조전랑을 배출하기 위해 많은 세력들이 힘을 쓰고 암투가 일었다고 합니다. 악형을 금지시켜 억울한 죄인도 살리며 재판받을 3번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신문고를 부활시켜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으며 사원을 정리하였고 경국대전을 발전시켜 속대전을 편찬해 나라의 기강을 잡았습니다.


정조에 이르러 소극적인 원론탕평을 발전시켜 적극적인 준론탕평을 실시했고, 세종대왕에 집현전이 있었다면 정조는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습니다.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였고 신해년에 일어나 신해동공이라 하는 일에서 노점상인을 동원해 시전상인의 독점을 막고 시전상인에 의해 유입되는 자금을 막았고 금난전권이라 하여 정부와 시전상인이 결탁해 노점상인을 막는 것인데 이를 폐지했습니다. 경국대전에서 발전된 속대전을 다시 한번 발전시켜 대전통편을 만들었습니다.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수원에 있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많이 찾는 정조는 수원에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을 축조시켰습니다. 정조의 단점은 성격이 조금 나쁜점이나 술을 잘마시는 점이었고 일찍 죽었다는 점입니다. 수원대학교를 진학해 수원에 버스, 지하철등을 이용해 다니면서 수원 화성을 보았는데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방문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대외관계로는 인조가 즉위하고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아닌 친명배금 명나라를 따르고 청을 배척하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청과 싸우는데 정묘호란때 청나라의 공세를 산성을 이용해 잘 막았지만 2차 침략인 병자호란때 산성을 지나쳐 오직 인조를 목표로 내려온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인조의 아들중 소현세자는 청과 전쟁이 있었지만 배울점도 있고 잘 지내보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봉림대군은 청에 원수를 갚겠다는 뜻을 인조에게 전하자 인조의 뜻과 맞았고, 마침 소현세자가 일찍 죽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왕위를 이어갑니다. 효종은 북벌정책을 펼쳤으며 러시아에 대항해 조,청 연합군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효종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숙종이 왕위를 이었지만 북벌정책은 약해졌고 청과 백두산을 두고 영토분쟁이 일어나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등 영토를 지키려 했습니다. 


한국사 강의 8강에서 캡쳐한 사진-조선과 청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 후기의 국내정치에서는 훈구에 의해 4번의 사화를 통해 고난을 받았던 사림파가 선조 이후에 권력을 잡았는데 동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등으로 시대에 따라 당파가 갈리며 혼란을 겪었고 이후에는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의 일문이 독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삼정문문란이 일어나 나라의 법도와 기강이 흔들리며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등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예언을 다루는 정감록을 많이 믿었고, 천주교인 서학 역시 보급되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파가 나누어 싸우는 것이 모두 해가 되는 점은 아니지만 너무 싸움이 심해져 한 파를 제거하는데 까지 이른다면 정말 부정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8강 조선후기를 듣고 내용 요약 및 느낌점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