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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7강 조선전기를 보고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이 원래는 조선이었다고 합니다. 이름이 같았는데 오래된 조선이라는 뜻으로 단군왕검의 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수도 이었던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했는데 천도 과정에서 정도전이 큰 노고와 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왕이 나라를 잘 이끌지 못했을때 이를 돕고 보좌하는 재상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재상정치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고, 정도전이 왕위를 이방원이 아닌 후처의 아들에게 이어주려한 점을 들어 제 1차 왕자의난 때 정도전은 죽임을 당합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를 이어받고 아버지인 이성계와 갈등이 있었고,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함흥으로 보낸 사람들이 아무 소식도 가져오지 못해 함흥차사란 말도 생겼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잃은 이성계의 슬픔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태종이 왕이 되고나서 토지정리를 하는 양전사업을 진행시켰고 막대기에 신상정보를 담아 조사등에 활용하는 호폐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주민등록증과 같이 자신을 나타낼수 있는 제도이었습니다. 6조 직계제를 실행해 재상 즉 총리를 건너띠고 곧바로 왕과 연결시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왕의 사립기구인 의금부와 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도 설치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을 펼쳐서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발전시켰는데 전국에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토지 노비를 몰수했고 앞날을 미리 점치는 도참사상 같은 미신을 타파시켰습니다. 태종하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하여가를 지었는데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단심가로 대답하자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과거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통해 지나친 왕권 강화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의정부에서는 3정승이 모여 올라온 의제를 상의해 왕에게 전달하고 왕은 다시 이를 확인한후 의정부에 내려보내면 3정승이 이를 하위 기관에 전달에 일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3정승의 의정부 권한이 높아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학술기관인 집현전을 만들었는데 집현전의 직무로는 경연과 서연을 담당하는것이었습니다. 경연은 토론하는 자리에서 유교적 소양을 쌓아 올바른 정치를 할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서연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집현전을 이루는 사람을 직급별로 다양했는데 인원은 여러차례 바뀌다가 1436년 20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미지 캡쳐-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은 지금의 한글의 시작은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2900종 언어 가운데 유네스코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위대함을 인정받았습니다.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까지 한자로 글을 적었기 때문에 글을 배운 계층만 글을 썻고 백성들은 글을 쓰지 못하는 점을 생각한 세종은 많은 반대에도 집현전과 노력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훈민정음, 한글이 만들어 지기전에는 어떤 언어를 썻는지 많이 궁금했는데 말은 지금처럼 했지만 한자를 통해 글을 쓰는것이 힘들어 지식 계층만 글을 썻던것 같습니다. 세종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가져왔는데 4군은 압록강 상류지역으로 최윤덕이 확보한 지역이고 6진은 두만강 유역으로 김종서가 확보한 지역입니다. 이종무는 대마도를 토벌했으며 일본과 여진에게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여 실시하는 교린정책을 썻습니다. 세종의 단점중에는 기름진 음식과 고기를 좋아했고 고혈압과 당뇨증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궁이 많아 자녀가 많았기 때문에 자녀들의 권력 다툼이 심한 점이 있었습니다.


세종에 이어 병약했던 문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뒤를 이을 왕세자를 도울것은 김종서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어 단종이 왕위를 이었는데 어린 단종이라 수양대군인 세조가 왕위를 얻으려 했습니다. 김종서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6조 직계제를 부활 시켰고 단종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인 세조가 왕위를 이어갑니다. 세조를 도왔던 인물중에 한명회라는 인물이 있는데 예전에 책으로 읽었는데 기억나는 부분은 많지는 않지만 세조의 책사와 도우미로서 세조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는 기억은 듭니다. 세조가 왕이 되었을때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것에 따라 조직적으로 통일된 법전이 있어야 했는데 세조 이전에 미약했던 부분이 세조가 왕에 있을때 경국대전을 편찬하므로써 나라의 기강을 잡았습니다.


세조에 이어 예종이 왕이되고 예종에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종 시절에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며 홍문관을 설치했습니다. 홍문관은 조선시대 궁중 경서와 사적을 관리했고 문한의 처리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왕권을 견제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했고, 앞서 설명한 경연이 확대되었습니다. 신숙주와 한명회로 대표되는는 훈구파를 견제했고 훈구파의 반대세력인 사림의 김종직을 내세워 훈구파의 독주를 막았습니다. 성종은 중전인 윤씨와 외도 문제로 다툼이 많았는데 중전인 윤씨가 실수로 성종이 용안에 기스를 내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일을 문제 삼아 사림세력에 의해 폐위가 된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음에 까지 이릅니다. 


성종에 이어 연산군이 왕이 되었는데, 훈구파는 세조를 비난 하는 조의제문을 근거로 들어 사림세력을 숙청하는데 이를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연산군은 사림의 모략에 의해 사약을 받은 어미니 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실록을 통해서 봤는데 그 기록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갑자사화로 사림세력과 어머니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을 제거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성종의 첩인 서모들을 죽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어머니의 죽음에 연관이 있다고 하여 대립했는데 인수대비는 이 일로 쇠약해져 앓다가 죽고 맙니다. 연산군은 넓은 지역에 금표비로 표시를 했놓고 사냥을 즐겼는데 그 지역에 잘못 들어가면 죽을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나 중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중종 시절에 조광조가 개혁을 통해 사림을 기용했으며 현량과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추천했습니다. 도교의 보존과 의식을 위해 설치되었던 소격서를 폐지해 도교의 미신을 믿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경연을 확대했고 소학을 보급했습니다. 소학은 송나라때 주자가 유학을 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해 썻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아주 유용한 교육 필수 교재로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조광조는 중종반정 과정에서 가짜 공신이 있는데 이들의 권리를 빼앗아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발단으로 해서 조광조는 역모로 몰려 사림세력이 숙청되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합니다. 나뭇잎에 조광조가 왕위를 노린다는 글자를 왕에게 보여주어 조광조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비극적인 사화로 끝이 납니다. 조선시대의 군국기무임무를 담당한 문무합의 임시기구인 비변사의 입지가 조금씩 높아지는 시절입니다.


중종에 이어 인종이 왕이 되었고 이후에 명종이 왕이 됩니다.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 많은 의지를 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을 아주 크고 비중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자신도 어머니묘 근처에 묘를 썻습니다. 이 당시 사림들 끼리 내전이 일어난 외척세력은 대윤과 소윤이 싸우면서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조선시대의 4대 사화로 많은 사림들이 죽었지만 선조시절에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하며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승려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했던 승과가 있었으며 임꺽정의 난이 있었고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한국사 강의 7강에서 캡쳐한 사진-임진왜란 현황



1592년 선조 시절에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일본은 전국시대가 마무리 되며 도요토미히데요시를 중심으로 무사들이 불만을 해결하고 영토를 얻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 조선을 공격합니다. 신림과 이인은 북방에서 명성을 얻었던 대단한 업적을 가졌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에 패배하며 명성을 잃었습니다. 이순신은 한산도와 명량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행주에서는 권율장군이 활약했으며, 진주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일본을 막았습니다. 의병활동도 많은 곳에서 일어났으며 명군이 참전해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길수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참전으로 많은 피해를 보며 힘을 일어 청에게 정권을 내줍니다. 일본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가 들어스며 조선과 잘 지내려고 했습니다. 선조의 신하들은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나라를 참전시킨 공이 있음을 알렸고 당근과 채찍처럼 유화책과 강경책을 썻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도자기들이 많이 유출되었고 도공들도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도 합니다. 임잰왜란으로 사회와 경제 구조가 붕괴되었고, 비변사는 최고 권력기구가 됩니다. 사명대사의 쇄환사는 일본으로 넘어간 도공을 다시 조선으로 데려오려했는데 일본에서는 도공들이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조선으로 돌아오는것을 원치않아 일본에 남은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의 문화유산으로는 도자기가 많은데요, 조선전기에 분청사기는 청자와 백자의 가운데 단계정도 되는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중기의 순백자는 사림세력이 좋아했는데 사림은 청렴하고 깨긋함을 드러내는 순백자를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청화백자라 하여 밑밑한 순백자보단 그림이나 무늬를 세긴 것을 만들었습니다. 명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청나라와의 이야기는 다음 강의에서 들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7강 조선전기를 보고 글을 써보았습니다. 조선전기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도 궁금하며 하나하나 배우고 알아가면서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