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9강 근대 개항기를 듣고 요약 및 느낀점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9강은 근대 개항기를 다루고 있으며,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집정기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명당을 영화관에서 보았는데요, 흥선 대원군 시대에 권문세족이 득세하여, 왕권이 약화되어 위태위태한 왕위를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풍수지리와 미래의 힘과 권력을 얻을수 있는 명당을 두고 펼쳐지는 영화 명당을 보면서 조선시대에 왕권이 강화되었던 시절도 있고, 왕권이 약화된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해 집정을 했는데요, 왕권 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많은 인력과 금전을 썻으며 탕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를 만들면서 물가가 폭등하는 인플레이션 현상을 겪습니다. 서원을 50여개만 나두고 정리하여 유생을 배출하는 것을 막아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양전사업을 통해 토지조사를 했고 호포법을 통해 양반들도 과세를 내게 했고, 곡식 부족을 해결하는 구민제도인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영화 명당에서 권문세족의 권세가 대단했다고 생각된 것은 왕족인 흥선대원군 조차 권문세족에 큰 힘을 쓰지 못하는 점이었습니다. 왕이 었던 헌종도 권문세족에 대항하려 하지만 왕세자의 안위와 왕권 유지를 위해서 물러서야 했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대외 관계에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칩니다. 천주교를 탄압해 프랑스인 9명을 죽인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군이 강화도로 쳐들어 오는 것이 병인양요입니다. 정족산성에서 양현수가 프랑스를 잘 막아내어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를 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해 돌아갑니다. 천주교를 거부하고 탄압하더라도 천주교 프랑스인을 죽이기 까지 했어야 됫는지 하는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납니다. 감옥에 가두고 괴로움을 줄지언정 죽이는 것은 프랑스로 하여금 반감과 응징을 불러오는 조치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거부정책은 아버지 남원군묘 도굴사건이 발생하면서 더 권고히 강해집니다. 미국과 강화도에서 전쟁을 한 신미양요도 병인양요가 있을즘 발생하는데요, 미국의 제너럴 셔면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에 왔는데 평양에 미국인들이 나타나자 조선은 미국의 제너럴 셔면호를 불태워 버립니다. 이로인해 미국은 강화도에서 조선과 싸우는데 군사 500명을 데리고 항전했지만 모두 죽고 미국도 조선과 수교는 하기 힘들겠다 판단하여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아쉬운것은 프랑스와 미국과 싸움을 하지 않고 수교를 맺어 앞선 문물과 천주교 및 서학, 기술등을 들여왔다면 외세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여러 곳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와 수교를 하지 않고 싸워 나갈 것임을 천명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집정도 점차 줄어듭니다. 이때 권력을 잡은것은 고종의 아내 중전인 민씨와 그 세력들이었습니다. 민씨는 잘 알려진 명성황후로 일본군에 의해 슬픈 결말을 맞습니다. 명성황후가 권력을 잡자 이전 정권과는 다르게 통상개화정책으로 외세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기술과 문물을 받아드이려합니다. 이 때 윤오호 사건이 일어나는데 윤오호는 일본의 배로써 조선의 바다에서 바다 수심을 허락없이 측량해 공격했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과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습니다. 최조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부산, 원산, 인천 을 개항하며 조선에서 해양측량권을 가지며 조선에서 잘못을 해도 일본에 가서 법적 절차를 따르는 치외법권등이 있었습니다. 윤오효가 왔을때 공격을 하기전에 말과 글로써 부당함을 말하고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치외법권은 상당히 부당한 권리로 아무리 잘못을 해도 조선에서 처벌하지 못하면 일본에서 작은 형량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보니 너무 불평등한 조약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명성황후시절 인쇄를 담당하는 박문국, 화폐를 담당하는 전환국, 무기를 담당하는 기기창등이 있었고, 조선의 군대로는 서양 세력에 대항하기 힘들다는 일본의 조언에 의해 일본인 장교가 고문을 맡아 세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있었는데 구식군대와 대비되며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은 대우가 좋고 뭐든 새것인것에 반해 구식군대는 월급이 몇달치가 밀려 원성이 자잣습니다. 1달치 월급을 받았지만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을 받자 반발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납니다. 이 때 대원군이 다시 재집권을 하였지만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요청하여 청이 개입하고 대원군을 중국으로 데리고가 실각시킨후 명성황후가 다시 복권합니다. 청과 조청상민 수륙무역장정으로 청을 상전으로 모시기로 하고 청 상인에 특혜를 주었고 청군이 주둔하였고 이때 조일 협약으로 재물포조약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간섭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몇달치 월급을 못받고 밀려 있는 상황에서 대우도 좋지 않은데 모래가 반 섞인 쌀을 월급으로 받았을때 어떤 심정일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화가 날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성황후와 그 세력에 반발하여 갑신정변이 일어나는데 우정국 축하연때에 거사를 하여 명성황후의 세력을 많이 축출하지만 명성황후는 잡지 못했습니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축으로 시작한 갑신정변은 개혁 14개조를 바탕으로 총리가 일을 하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했고 신분제 폐지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청하며 청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하여 3일천하라 합니다. 이때 일본군이 갑신정변을 도울 채비가 덜 되어 청군의 개입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청군의 개입과 반란 진압과정에서 일본이 피해를 입었고 이를 두고 한성조약을 맺어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때 텐진조약도 체결되는 청,일이 동시에 철병 즉 군대를 본국으로 데려가고, 상호 통보하에 조선에 다시 오기로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의 뜻과 동학농민운동의 뜻을 이어 받은 갑오개혁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세의 금납화와 도량형의 통일, 신분제 철폐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했는데 면포를 수입하는 대신 쌀을 수출하는 상황이었는데 면포는 없어도 괜찮지만 쌀을 없으면 사는데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곤란한 문제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청에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청의 간섭이 심해져 피해가 있는것과 일본의 간섭으로 있는 피해, 조병갑의 학정을 보듯 지도자들의 잘못된 통치에 화가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계기이었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교조 최재우가 죽임을 당하자 2대 교주인 최시행은 교조신원운동을 펼쳐 자신이 교조 최재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동학농민운동을 권고히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4만명정도로 추정되는데 전주지역을 확보하면서 위태해지자 명성황후는 관군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진압합니다. 외세에 의해 혼란한 시대를 맞는 근대 개항기를 보면서 정말 힘든 상황에 있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텐진조약으로 청,일이 동시 철병했지만 동학농민운동을 저지 하는 과정에서 다시 외세에 힘을 빌리는 과정에서 청과 일이 다시 조선으로 오면서 기회를 놓친점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아니었더라도 언제든 근대 개항기 시절에는 외세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던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9강 근대 개항기를 듣고 내용요약과 느낀점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