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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6강 고려시대 강의를 듣고

고려의 건국주는 태조 왕건입니다. 2000년 4월 1일 부터 2002년 2월 24일까지 200부작으로 찍은 드라마 태조왕건을 보면 고려의 역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을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태조왕건 드라마를 TV다시보기나 웹하드 등을 통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조 왕건은 세금을 감면하고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불교행사를 성대히 열어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태조왕건은 호족들과 연대 관계를 맺고 지지를 얻기 위해 각 지방의 유력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많은 결혼을 하였고 자녀들도 많이 두었습니다. 태조 왕건이 살아있을 때에는 강력한 힘이 되어주는 결혼정책이었지만 태조 왕건이 죽고 나서 왕위 다툼이 있을수 있기에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세력가를 견제하기 위한 사심관 제도를 실시 했으며, 기인제도라 하여 위력 가문의 자제들을 개경에 불러들여 살도록 함으로써 위력 가문들이 반발할 것에 대비했습니다. 불교행사를 성대히 열어 백성의 민심을 달랬으니 고려 태조 왕건의 시대에는 불교를 숭배하는 숭불 정책이 이뤄졌습니다. 거란에 멸망한 발해는 요나라가 되었는데 북진정책을 펼쳐 영토를 확장시켰습니다. 흑창이라는 구민제도를 통해 곡식을 융통성 있게 관리 함으로써 민심과 백성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의 일부를 알아보겠습니다.


1조-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여라. 제 1조는 숭불 정책에 의해서 나온 조항입니다.


2조-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마라. 풍수지리가 보편적으로 쓰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조-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의 문화를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임으로 그들의 의관제도는 따르지 마라. 중국을 따르지 말라 했지만 어느정도 중국에 영향이 있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볼수 있고, 거란은 적대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 켭쳐-고려의 태조 왕건



태조 왕건의 시대를 지나 광종이 왕이 되었을 떄 노비안검법을 적용시켜 억울한 노비를 풀어주었습니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고 군대에 가지 않으며 귀족들이 값없이 부릴수 있었기에 노비가 줄어들면 귀족은 손해이었고, 왕의 입장에서 세금과 군역을 보충할수 있었기에 노비가 줄어들면 왕권이 강화되는것입니다. 광종 시대에 과거젣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신라의 계급제도 하에선서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뛰어나도 올라갈수 있는 직급이 계급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는데 과거제도를 통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등용될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종은 중국과 교류등에서는 국왕이라는 칭호를 썻지만 칭제건원이라하여 자신을 황제로 칭함으로서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안을 강화하고 왕권을 권고히 하려 했습니다.


광종에 이어 성종이 임금이 되었었을때 최승로가 시무28조를 만들었는데 유교의 사상이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숭불정책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에 유교의 사상이 접목되는 시절입니다. 중국의 체제 유지 방법을 반영한 행정 구역정비가 있었으며 구민제도인 흑창은 의창으로 발전되어 백성을 도왔습니다. 곡물의 유통을 조절하여 물가를 조정하는 상평창이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공민왕 시절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고 몽고에게 간섭을 받습니다. 고려의 왕은 몽고의 왕족 여자와 결혼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중국에 원나라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원나라 혜종의 황후가 된 고려출신의 기황후의 오빠 기철과 공민왕이 대립이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아들이 태자가 되는데 이에 의기가 양양해진 기철은 공민왕에게 공손하지 못했기에 대립이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으로 빼앗겼던 쌍성을 탈환하고 신돈이라는 승려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전빈병정도감은 노비안검법과 마찬가지로 노비에서 탈피 시켜주는 제도 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몽고의 왕족 여자인 노국공주와 결혼혼했는데 아이를 낳다가 노국공주가 죽어 슬퍼하고 상심하여 국정을 잘 돌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친위대장인 홍윤에 의해 암살되면서 비극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고려 전기의 정치는 10세기에는 호족 11C에는 문벌귀족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음서제는 3촌이내 5품이상의 직급이 있으면 정치적으로 어드벤티지를 주는 제도 이었으며, 공음전은 5품이상 고위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로서 자손에게 상속이 가능했던 특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벽란도를 통해 교역을 하였는데 수도 개경과 가까웠으며,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쉽고 물살이 빨라 무역하기에 좋았고 아라비아 상인도 올만큼 국제 무역항구로써 역활을 톡톡히 했습니다. 이자겸의 난을 통해 왕위를 얻으려 했던 문벌귀족은 반란을 했다는 이유로 세력이 약화됩니다. 그리고 당시에 묘청이라는 사람의 서경천도를 외치며 서경파를 만들었고 이에 반하는 개경파가 대립했습니다. 서경파는 묘청과 정지상이 있고 개경파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있습니다. 서경파는는 불교를 따랐고 급진적이었으며 고구려의 성향을 가졌으며 개경파는 유교를 따랐고 보수적으며 신라의 성향이 있었습니다. 내전으로 번진 서경파와 개경파의 싸움에서 승리한 개경파는 서경천도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호족과 문벌귀족 세력이 장악하던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가 옵니다. 이의방과 정중부의 무신정변에 의해 문관들이 살해 당했으며 무관은 정권을 차지 합니다. 정중부는 이의방을 살해했고 경대승은 정중부를 살해하며 실권을 잡습니다. 경대승에 이어 이의민, 이의민 이후 최충현이 무신 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최충현은 인사를 발령하는 정방을 자신의 세력 건물에 설치하며 권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삼별초를 증편하여 군대를 강화시켰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무신정권은 급이 더 높은 문관을 치고 얻은 정권이었기에 하극상의 성향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분이 높지 않았던 이의민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본 농민들도 봉기를 일의 켰으며 최충현의 노비인 만적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고려 후기는 몽고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무신정권이 물러나고 몽고와 결탁한 권문세족이 힘을 가진 시절입니다. 고려는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몽고의 왕족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고, 동녕과, 탐라, 쌍성을 뺴앗겼으며 몽고가 일본을 치기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이 내정간섭을 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2차에 걸친 일본과의 전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사회 변화는 조혼의 풍습이 있었는데 몽고군의 영향으로 자녀를 예속시키기 위해 행해졌고, 응방 즉 몽고어를 잘하면 성공할수 있고 몽고인이 좋아했던 매를 잘 기르면 고가에 판매할수 있었기에 도둑도 많았다고 합니다. 몽고의 음식이 고려에 전해졌는데 소주와 막창, 산적, 곱창이 있고 고려의 것이 몽고로 전해진것에는는 백설기, 한복등이 있다고 합니다.


13세기에는 신진사대부가 성장했고 권문세족과 대립을 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홍건적과 왜, 몽고와 전쟁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 최영과 이성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습니다. 최무선의 화포개발은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큰 업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권문세족은 대지주이었고 불교를 따랐으며 친원파이었고 음서제를 통해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신진사대부는 중소지주로써 유고를 따랐고 친명파이었으며 과거제를 통해 권력을 얻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는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를 지지했습니다.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최영을 실각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리면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귀족을 흔들기 위한 정책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함으로서 귀족을 약화시켰습니다. 당시 급진파로는 조선이 건국에 힘썻던 정도전이 있으며, 고려에 충성을 다했던 온건파 정몽주가 있습니다. 


고려의 문화 유산으로는 직지심체요절이란 금속활자가 있으며 몽고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팔만대장경 목판본이 있으며 당시 중국의 송과 교류를 하며 도자기를 배워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상감청자가 있습니다. 고려의 대외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고려는 거란과 부딪혔으며 거란이 세운 요와 싸웠습니다. 요는 송과 권력 다툼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잘 지내기를 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려와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져 전쟁을 했는데 고려와 요의 1차 싸움에서 서희가 말로써 전쟁을 하지 않고 강동6주를 고려의 영토로 수복했습니다. 2차 싸움에서는 고려의 강조가 패배하며 개경을 빼앗기고 왕이 피신을 했었고 제 3차 싸움에서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승리했지만 거란이 세운 요와 문화적구분도 하고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한국사 강의 6강에서 캡쳐한 사진-고려의 문화유산



여진족은 발해를 구성했던 말갈족과 연관되어 있는데 여진은 금나라로 발전합니다. 고려의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금나라와 전쟁을 통해 독북9성을 수복하지만 지금의 함경북도와 간도는 산세가 험하고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아 지키기 힘들어 금나라에 반환을 했습니다. 고려는 몽고와 대항해 대몽전쟁을 40년에 걸쳐 했는데요, 이 전쟁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으며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습니다.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려의 무신집단인 삼별초는 삼별초 명부가 몽고에 넘겨짐으로 모두 죽을 위기에 쳐해지면서 마지막까지 몽고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6강 고려시대 강의를 듣고 내용을 요약하고 다른 내용을 찾아보고 읽어 덧붙여 글을 썻고 느낀점을 써보았습니다. 13강까지 있는 한국사 강의를 다 듣고 기초를 튼튼이 한 다음 다시 한번 13강을 다시 듣는다면 내용을 더 자세히 파악하고 기억하고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