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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4강 삼국시대를 보고 요약과 느낀점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4강 삼국시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시대의 주인공입니다. 고구려는 고씨가 왕위를 이어받는 체제이며 건국주는 주몽으로써 졸본에 수도를 두었으나 졸본이 좁아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바꾸었습니다. 국가정비를 한 왕은 태조왕이며 고국천왕 때 을파소의 건의에 의해 진대법을 실시하였는데 봄에 대출을 해주고 가을에 되갚는 방식의 춘대추납 방식이었습니다. 을파소는 귀족들이 권력을 독차지 하는것을 막는 일을 했으며,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행위도 근절시켰습니다. 책 읽기와 역사문화 공부하기 무예익히기 등을 교육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을파소의 건의에 의해 통과된 춘대추납의 진대법으로 곡식과 식량이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대처해 나갈수 있었습니다. 


백제는 부여씨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건국주는 온조이며 온조는 주몽의 아들입니다. 지금의 한강 일대에 위례성(한성)에 수도를 두었습니다. 고구려의 귀족회의에 귀족이라는 회의가 있었다면 백제에는 정사암 회의라는 귀족회의가 있었습니다. 신라의 건국주는 박혁거세로 신라는 완전한 왕권 체제가 처음에 자리잡지 못했고, 3국중에서 발전이 가장 더디었습니다. 박, 석, 김 3씨 성이 지도권을 나눠 가졌었고 화백회의라는 만장일치제의 귀족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가 AD 2-3세기 정도되는데 중국은 한나라에서 후한, 후한에서 위촉오 삼국시대에 이은 진이 중국에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AD 4세기는 삼국의 성장기에 해당합니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낙랑을 정복하며 고구려가 발전해 나갔지만 고국원왕때 평양을 상실했습니다. 소수림왕 때에는 불교를 수용하여 왕권을 강화했는데 전쟁등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환생을 하기 때문에 죽었을 지라도 다시 태어난다는 불교의 교리는 민심을 누그러 트리는데 일조하였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절 왕권을 강화하면서 부자상속을 인정했고 평양과 마한을 정복했으며 요서, 산동, 규수에 진출하여 위세를 드러내었습니다. 여기서 정복과 정벌, 진출을 설명하셨는데 정복은 적진에 쳐들어가 장악을 하고 병합하는 것을 뜻하며, 정벌은 적진으로가서 한번 혼내주고 돌아오는것을 의미하며, 진출은 적진에 가서 여러 영향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백제도 침류왕때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캡쳐한 사진-삼국시대에 받아들여진 종교 불교



신라의 발전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조금 느렸습니다. 지도자인 왕을 내물 마립간이라고 불렀는데 점차 호칭이 바뀌어 나갑니다. 초기에는 거서관이라 하여 박혁거세를 의미했고 이후에 차차웅이라 하여 제사장을 의미했고, 다음은 이사금이라 하여 원로 내지 연장자를 뜻했으며 이후에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점에서 고구려, 백제보다 발전이 느렸다는것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박, 석, 김이 지도권을 나눠가지다가 나중에는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했습니다. 삼국의 성장기에 해당하는 AD 4세기경 중국은 남북조시대라 하여 북쪽은 이민족의 북조가 있었고, 남쪽은 한족의 남조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은 5호 16국 시대라하여 나라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었으며 기회의 시간이 되었고 세력을 얻기위해 경쟁이 가속화된 시절이었습니다.


AD 5-6세기는 항전기로써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등장합니다. 엄청난 국토를 고구려의 것으로 만들었던 광개토 대왕은 백제와 금관가야를 제압하므로써 국력을 회복시켜 나갑니다. 요동지역을 정복하며 북방으로 힘을 뻗쳐나갔고 일본과 가야 백제에 탄압을 받던 신라를 도와주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이름에서 부터 특징을 생각해볼수 있는데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름과 어울리는 삶이었습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이 40세 이었지만 장수왕은 93세를 살았다고 합니다. 장수왕의 아들이 장수왕보다 일찍 죽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손자가 왕위를 이어 받을 정도로 오래 사셨습니다. 수도를 바뀌는 천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했는데 이는 남쪽으로 뻗어나가려는 남진정책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어른 관련 이미지 캡쳐-고구려의 부흥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쓰는 시점에 백제의 왕은 개로왕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백제를 정복하기 위해 도림이라는 승려를 스파이로 백제에 보냅니다. 도림은 바둑을 매우 잘두었는데 개로왕도 바둑을 즐겨두었습니다. 도림의 실력이 개로왕보다 더 뛰어났는데 개로왕과의 바둑경기를 막상막하가 되도록 두어 접전을 만들어 개로왕과 아슬아슬한 승부를 통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면서 도림이 세상이 이런저런 일도 이야기하고 조언도 하면서 궁궐이 작으니 더 큰 궁궐이 필요하다고 부추기자 개로왕이 궁궐을 키우는데 열을 냅니다. 온간 장식이나 여자들을 들으는 일도 부추겼고 개로왕을 비판하는 충신들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백제를 칠 기회가 왔음을 알리고 개로왕은 고구려가 쳐들어 오자 아차산으로 도망갔지만 죽고 맙니다. 한강 일대가 고구려로 넘어가면서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남진시켰습니다. 


그 이후 무령왕 때 국력을 차즘 회복하며 지방을 다스리는 22담로를 두었으며 국호를 남부여로 했고 웅진에서 사비로 다시 한번 천도를 했습니다.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신라와 손을 잡고 구구려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신라와 백제의 연합은 신라의 진흥왕의 배신으로 깨지는데 화가난 성왕이 신라를 공격했지만 죽었고, 한강 일대가 신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지증왕때 신라 최초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했고 법흥왕 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를 시작했습니다. 성골, 진골, 6품-1품에 따라 입을수 있는 옷 색깔을 구분했으며 승급수 있는 관직도 계급에 따라 한계가 있었습니다. 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공인한 것은 승려 이차돈의 역할이 컷습니다. 불교를 반대하던 귀족들 앞에서 자신의 목을 자르면 하얀피가 흐를것이다라며 순교한 이차돈의 역할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하얀 피가 흘렀을지는 미지수 이지만 이차돈의 용기와 기개가 불교를 수용한 큰 이유이었을 것입니다.


신라는 진흥왕 시절에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갖추는데 유명한 화랑제도를 정비했고, 대가야와 한강지대를 정복했기 때문에 비옥한 토지와 물이 있어 많은것을 갖출수 있었습니다. 성왕과의 약조를 배반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호평을 받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진흥왕은 4대 순수비를 통해 확장된 영토를 나타내었고, 단양적성비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알리려고 했습니다. 반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에 이은 장수왕이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자신들의 영토 확장을 알리었고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워 아버지의 업적을 알리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5호 16국의 혼란과 분열을 마치며 수나라가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한국사 제4강에서 캡쳐한 사진-고구려 장수왕, 신라 진흥왕의 세력지도



7C 통일기에는 수나라, 수나라 다음의 당나라가 고구려와 싸웠던 역사가 이어집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에 관심이 많았는데 돌궐족과 부딪혔습니다. 이 돌권은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고 동맹관계에 있어서 수나라, 수나라 다음의 당나라는 이런 이유로 고구려와 전쟁을 했습니다. 수나라 때 고구려와의 전쟁을 고수전쟁이라 하는데 수나라는 11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옵니다. 정말 많은 수의 군대인데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큰 승리를 거두며 수나라 수양제는 전쟁의 여파로 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맙니다. 


수나라 군대가 숫자는 많았지만 정비가 잘 안된 군대이었다면 수나라에 이어 정권을 잡은 당나라의 30만 대군은 잘 짜여진 막강한 군대이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밀어부쳤으나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에 의해 막히면서 회군을 합니다. 이 시절 백제는 의자왕이 왕위를 이어갔는데 진흥왕의 배신으로 죽은 성왕의 원한을 이어받아 신라를 선제 공격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차지 합니다. 신라의 본토와 가까웠던 대야성이 넘어가며 신라는 위태로운 상황에 이릅니다. 신라는 이 상황에서 당나라와 화친을 맺어 나당연합을 만들었고 이에 백제는 왜(일본)와 손을 잡았고 고구려는 돌궐과 힘을 합쳐 이어 대항하는 시절이 옵니다. 이것을 십자외교라고도 하는데 십자형태로 동맹국을 나타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무열왕과 유명한 김유신은 백제와 전쟁을 하는데 백제의 장군 계백과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 계백장군은 자신의 가족이 포로가 되니니 자신이 죽이며 군사들의 사기와 마음을 다 잡았고, 김유신 또한 화랑의 관창과 반굴을 희생시키며 신라의 사기를 높이었습니다. 결국 수가 더 많은 신라가 백제를 이기고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백제는 이후에 백제 부흥운동 일으키려 노력을 해봤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역사 채널 그날 이미지 캡쳐-십자외교 지도



나당 연합에 맞서 고구려는 연개소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가져갑니다. 초 강격파인 연개소문은 1차 나당연합의 침공을 잘 막아냅니다. 연개소문을 이은 아들들의 권력다툼이 나당연합군의 승리를 가져다준 실수가 되어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노렸으나 실패했습니다. 신라는 백촌강에서 왜(일본)을 격토했고 백제 부흥군을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를 막기위해 지원을 했지만 당나라에 의해 제압당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는 연합을 했지만 마지막에는 전쟁을 하는데 신라가 매소성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지금의 한반도보다 조금 적은 영토를 확보하며 문무왕 676년에 삼국을 통일한 나라가 됩니다. 조금은 아쉬운 영토의 면적이지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는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합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당시 면적이 현재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와도 비슷했습니다. 고구려 북쪽 지방에는 당나라의 지배를 이겨내고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가 들어섭니다.


지금까지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4강 삼국시대를 보고 요약과 느낀점을 써보았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배웠던 역사 공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생각나는 시대는 삼국시대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마치 중국의 위, 촉, 오의 대결을 보는듯 치열한 정치적, 군사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삼국지를 읽고 중국의 거대한 싸움의 웅장함을 느꼈다면 한국사 제4강 삼국시대의 고구려, 신라, 백제의 전쟁에서 이런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울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도 부를만큼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과 다툼 싸움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싸움과 다툼이 있지만 예전 시대보다는 많은 희생과 전쟁이 줄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영화 안시성을 곧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데 당나라와의 전쟁을 그린 영화라는 사실을 오늘 배웠습니다. 영화 안시성을 영화관에서 보고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