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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3강 연맹왕국 강의를 보고

중국 한에 의해 중계무역에서 이득을 챙긴다는 빌미로 멸망한 고조선에 이어 삼국시대전에 연맹왕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한의 설치한 4군은 한의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것과 관리가 잘 안되어 토착세력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고조선에 이은 연맹왕국으로는 부여와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진한+마한+변한)이 있습니다. 부여는 5부족 연맹제로서 왕권이 강하지 못했고 5개의 부족장이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여의 지방을 다스렸던 대가들은 말과 소, 돼지, 개를 섬기며 맡은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반은 농사 반은 목축을 했으며 주옥이나 모피와 같은 특산물도 만들었습니다. 부여에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왕이 죽었을때 함께 묻는 풍습으로 조금은 무서울 정도인데 불교가 유입되면서 순장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윤회를 해서 현시세계로 돌아 온다고 하여 왕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가 정착됩니다. 부여에는 물건을 훔치면 물건값의 12배로 배상해야 하는 1책 12법이 있었으며 소 뼈를 가지고 점을 치는 우제점이라는 주술적인 행위도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제천이라는 행위는 요즘의 명절과 비슷한데 12월에 행해지는 영고가 있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캡쳐한 사진-부여의 위치



고구려는 중앙집권이 완성된 삼국시대의 고구려가 아닌 고조선 이후의 연맹왕국의 고구려로서 고구려의 시초인 주몽이 부여에서 왔기 때문에 부여와 비슷합니다. 5부 연맹제로써 관, 순, 절, 게, 소의 5개 성을 가진 성씨 연맹이었습니다. 지금시대에 소씨를 제외하면 거의 보기 힘든 성씨인데 동맹왕국 시절에는 많이 있는 성씨이었던것 같습니다. 각 지방은 고추가와 상가가 다스렸으며 약탈경제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냥을 통해 고기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소금이나 향신료 옷감을 구하기 힘들어 옥저와 동예와 중국의 요동지역을 쳐들어가 물건을 빼앗아 조달하는 약탈경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탈해온 물건들은 부경이라는 창고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형이 죽으면 형의 와이프를 취하는 형사취수제를 행했는데요, 이는 형수가 남편이 없이 경제적으로 생활하기가 힘든점과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면 형의 재산을 잃을 수 있는 점을 보완하기위해 형사취수제가 있었습니다. 현시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형사취수제라서 조금은 이상하고 이해가 안될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기 힘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시행되었던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서옥제라는 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결혼한 여자의 집에 가서 가건물을 지어놓고 노동력으로 처가에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극동대혈이라는 제사가 있었고 10월에 재천행사인 동맹이 있었습니다.


한국사 강의 3강에서 캡쳐한 사진-연맹왕국 시대 나라 위치



옥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평야 지역에 있었고, 동예는 강원도 산간지대에 있었습니다. 중앙 집권적인 나라로 발전하지 못했고 연맹왕국도 아닌 군장 즉 추장이 다스리는 체제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약탈정책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었던 나라로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을 빼앗겼고, 동예는 조랑말과 단궁, 바다표범의 가죽등을 빼앗겼습니다. 나중에는 고구려가 조금씩 빼앗느니 정복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옥저와 동예가 고구려에 의해 병합되었습니다. 옥저의 풍습으로는 여러서부터 시집살이를 하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 공동무덤인 골장제가 있었습니다. 동예에는 책화라는 씨족이 모여사는 풍습이 있었고 단 결혼은 다른 씨족과 가능한 족외혼이 있었습니다. 독립적인 공간이 있는 한자 려와 철자 모양의 집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옥저에는 재천행사가 없었고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재천행사가 있었습니다. 동예에 바담표범의 가죽이 나왔는데 이는 예전에 바다표범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옥저와 동예의 피해가 심했는데 어느 시대를 봐도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 양육강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삼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진한과 마한 변한 세나라를 합쳐 이르는 삼한은 제정분리 사회 이었습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제사와 정치를 아우르는 지도자이었다면 삼한은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이었습니다. 대군장은 읍차라는 직책이 맡았으며 종교를 맡은 천군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천군관할 지역 소도는 성역으로 지정되어 범죄자가 이곳에 피신했어도 잡아갈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TV등에서 죄가 있어도 어느 곳에 가면 잡을 수 없다는 내용을 들었는데 천군관할 지역 소도를 통해서 그런곳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했습니다. 마한 같은 경우는 나중에 백제에 의해 병합되고 진한은 신라에 의해 병합됩니다. 변한은 나중에 가야연맹이 됩니다.


웹사이트에서 캡쳐한 사진-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과 동예



삼한의 경제는 남부지방의 발전한 벼농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곡창지대로 유명한 전라도를 생각해 봤는데 그 시절에도 벼농사가 잘 되었다고 하고 전남 광양과 경상도의 포항에 있는 재철소가 있듯 그 시절에도 철기가 발달해 있었다고 해서 지금과 이어지는것 같아 신기했습니다. 철기는 낙랑이나 왜에 수출까지 했다고 합니다. 삼한의 풍습으로는 무덤에 수로를 만들어 도굴을 방지했던 주구묘가 있고 동굴안에 거주지를 만든 토실이 있습니다. 농촌 공동 조직체로서 노동력으로 서로를 도왔던 두레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제천행사로는 5월에 수릿날로 오늘날 단오이며, 10월에 계절제는 오늘날 상달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야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선민사상은 혈통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가야의 건국주는 김수로 입니다. 황금알 6개가 내려왔는데 그중 가장 큰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가야의 건국주 김수로 입니다. 가야는 성산산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금관가야, 소가야가 있었는데 초기엔에는 금관가야가 가야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싸움에서 주도권을 잃고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야를 주도하였습니다. 신라 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병합된 가야는 벼농사가 잘되고 제철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금동관, 철갑옷이 발전했고 가야는 토기 기술이 발전해있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통으로 된 가야의 갑옷 판갑은 철기 제품으로 유명했지만 고구려의 비늘갑은 철조각을 연결했기 때문에 판갑보다 단가가 비싸고 유지 보수가 힘들었지만 갑옷이 가볍고 여러모로 더 뛰어난 갑옷이었다고 합니다. 가야는 산에 고분이 있는데 작은것은 작지만 큰것은 엄청 큰 것이 있는데 200개의 가야고분이 뭉쳐있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가야의 고분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사 강의 3강에서 캡쳐한 사진-가야 지도



2강 고조선에 이어 3강 연맹왕국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석기시대부터 고조선 그그 이후 연맹왕국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배운기억이 오래되었는데 다시 한국사 강의로 배우면서 지식을 탄탄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강의도 집중해서 잘 들어서 한국사에 대한 지식을 더욱 탄탄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3강 연맹왕국 김영준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내용을 요약하고 느낌점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