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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0강 대한제국을 보고 내용요약 및 느낀점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0강 대한제국 영상을 보았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에 조선에서 영향력을 갖지 말라며 손을 떼라 했고 전쟁의 승리를 통해 청에 배삼금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청의 요동반도를 승리에 대한 대가로 받았는데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이 요동반도를 돌려줄것을 갑선하여 이 삼국은 강한 나라라 이길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에게 돌려줍니다. 중전 민씨인 명성황후는 청에게 도움을 받고 청을 지원했는데 일본이 러시아에게 약하다는 느낌을 받고 러시아와 친해지려고 했습니다. 친러내각을 구성하여 러시아의 조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합니다. 한 나라의 황후가 일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며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명성황후가 있는 한 조선의 지배권을 갖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을미사변을 일으켰던것 같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머리를 짧게 짜르는 단발령을 내려 양반과 유생의 반대를 받았고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소학교에 여성도 입학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머리카락도 부모에게 물려받았다 하여 머리카락을 길르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고, 여성은 이전에 소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남여가 평등하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나이가 들어 죽고 중전민씨 명성황후도 을미사변으로 죽자 조선에는 고종이 남았는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며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김홍집은 명성황후의 친러내각을 주도 했지만 이후에 일본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고종이 세운 친러내각에 의해 제거됩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이후 세양세력의 이권 침탈이 지속되어 광산과 산림 체굴권등을 넘겨줬는데 이는 세양세력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을 지키려고 했던 일이었습니다. 광무개혁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것이었는데 구본신창이라 하여 옛걸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것을 하자라는 뜻으로 온고지신과 비슷한 말입니다. 양전사업으로 토지조사와 정리를 하였고 기술학교를 설립해 앞선 기술을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다면 고종에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고, 명성황후의 죽음도 고종이 외로워지고 위험해지는 일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이 시절에 1898년 독립협회가 만들어 졌는데 갑신정변, 갑오개혁과 같은 개혁의 실패는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해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서 독립문을 만들어 국가의 위기속에 변화해야한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친일반러 성향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를 두려워 하며 일본의 모습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서재필과 이승만이 주도했습니다. 부산근처에 있는 절영도를 타국의 유상이나 무상으로 사용하려는 조차를 저지 하므로써 외세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발전하는데 현의 6조를 발의 되었고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습니다. 하지만 황국협회란라는 왕과 연결된 어용단체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면서 계획은 무산이 되고 맙니다.


영상에서 캡쳐한 사진-독립신문과 독립문



계몽운동으로는 1904년 보안회가 일본의 황무지를 개간해서 사용을 반대하는 항일 단체로써 활동을 했습니다. 헌정연구회가 헌법제정을 촉구에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려 했고, 대한자강회는 국민교육을 통해 인재를 배양하려 했으며, 1907년 신민회는 공화정을 주장합니다. 이런 계몽운동은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힘이 약한 순종을 왕위에 올리며 약화되고 맙니다. 계몽운동으로는 서상돈이 대구에서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있는데 일본에 진 채무를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하여 갚아나가려 했지만 이완용이 주도한 일진회의 탑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갑니다. 당대에는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군으로 투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친일 행위로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시대마다 생각과 행동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다양한 이야기와 전쟁이 있어왔지만 가장 가까운 시절은 조선시대의 이야기는 더 영향을 받고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후에 조선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러일 전쟁이 반발했는데 일본이 승리를 거두며 미국과 가쓰라 테프트 조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인정하며, 일본이 조선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토대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제 2차 명일 동맹을 통해서 여러 안정을 도모하였고,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조선반도의 주도권을 잡아갑니다. 한일의정서를 통해서는 군용지 사용권을 얻어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제1차 한일 협약을 통해 일본의 고문정치가 강화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고 을사5적중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하고 위협하였으며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합니다. 일본이 조선에 주도권과 힘을 가지기 위해 많은 전쟁과 조약을 맺었고, 을사5적의 친일 행각으로 조선은 점차 일본에 의해 힘을 잃어갑니다.


조선이 아주 힘겨운 상황에 있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지만 잘 안되었고, 이준 열사는 할복까지 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다른 나라의 큰 도움을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고종이 강제 퇴임되며 통감 권한이 강화되어 일본의 지배력이 강화되었고,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은 정미의병에 참가하여 일본에 대항했으며 후에 독립군으로 합류하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사법권이 박탈당한 기유각서라는 일이 있었고 1909년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입니다.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 영화가 안중군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시대의 사건을 재조명한 영화인데 아직 제대로 본적이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습니다. 1910년 조선은 주권을 박탈당하고 한일 병합이 되며 나라가 경국술치의 비극을 맞이합니다. 한국사 10강을 보면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가 조금 약하거나 없었다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청과 러시아가 이겼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지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0강 대한제국을 보고 내용요약 및 느낀점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