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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2강 강의 해방과 분단을 보고 내용 요약 및 느낀점

어느덧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강의 12강을 보고 글을 올립니다. 선사시대와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하여 한국사 12강 강의 해방과 분단을 보며 한국사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1943년에 카이로 회담에서 최초로 대한민국의 독립이 언급되었습니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는 위도 38도에 있는 38선을 분할하여 북쪽의 관동군은 소련이 해체 시키고 남쪽의 대본영은 미국이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가 시작되는데 이는 남북분단이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건국동맹, 옌안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있었으며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합니다. 일본어로 해방을 알리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8월 15일 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해방을 인식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국내의 조선건국동맹은 좌파와 우파를 아울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미국은 공산주의의 좌파가 같이 있는것을 싫어해서 건국준비위원회가 길게 지속이 안되습니다. 좌파 우파에 대한 구분을 잘 하지 못하겠는데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좌파라 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것을 우파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나누는 기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당대에는 공산주의적 성향을 띄는 파를 좌파라 한다는것은 맞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인 지금에서의 좌파가 공산주의를 뜻하는건 아니기에 조금 혼동이 되는것 같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좌파는 신탁통치에 대해 반탁을 주장하다 찬탁으로 돌아섯고 우파는 반탁을 그대로 유지하여 좌파와 우파가 갈리는 사건이 됩니다. 좌파가 반탁을 계속해서 주장했다면 상황이 바뀔수도 있었겠지만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의 통치를 거스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여러가지 일을 중재하려 했지만 미소간의 의견대립이 있어 휴회가되고 협상이 결렬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진 못했습니다. 김일성, 이승만과 김구가 힘을 합쳐 하나의 정부를 수립했다면 정말 나은 결과가 되었을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는데 정부에 의해 좌익이 학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주 4.3사건이라하여 많이 들어는 봤지만 잘 몰랐는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했던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주 4.3사건이후에는 1947년 여수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수 14연대중 1개 대대가 여수 순천등을 장악해 친일파와 경찰 우익인사를 인민재판을 열어 죽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민족이 사상과 생각이 차이로 서로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많이 죽은 사건으로 정말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김구 선생님과 김규식은 북한을 방문해 나라를 합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일성의 북한 정권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축하연에 김구 선생님과 김규식을 초대하는 모양이 되었고 김구 선생님이 강단에서 함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구선생님은 저격으로 돌아가셨는데 김구선생님이 더 오래 사셨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김구선생님의 주장이 받아들여 졋다면 한국전쟁의 비극도 막을수 있었을것 같습니다. 예전 중학교 시절에 김구선생님의 책을 보고 독후감을 쓴적이 있는데 김구 선생님의 주장을 많이 옮겨 적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 모방을 했던지 글을 읽은 다른 친구가 너무 비슷하다고 지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 다시 김구선생님의 책을 읽고 더 나은 독후감을 쓸수 있도록 해보고 싶습니다.


12강 강의에서 캡쳐한 사진-얄타회담 모습과 반민특위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데 미국의 애치슨 선언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키고 군비감축을 선언합니다. 이를 애치슨 선언은 김일성이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을거라 오해를 하여 6월 25일 남침을 하는데 원인이 되고 맙니다. 방어선을 후퇴시키지 않고 군비감축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전쟁이 조금은 늦게 일어날수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전쟁을 막을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정권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은 남침전에 북한과 싸워도 지지 않을거라고 말했으며 남침당시 북한이 지고 있는데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말했고, 당시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오는 다리가 하나인데 이 다리를 폭파하는데 연루되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지속된후 국민방위군을 만들어 10만명을 전쟁에 투입했는데 보급물자를 착복하여 국민방위군은 추위속에서 얼어 죽고 싸우다 죽었다고 합니다. 전쟁상황이라 힘든 상황을 알기에 비난을 하면 안되겠지만 조금 더 현명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바뀌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많이 재작되었고, 중공군의 참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본 기억이 납니다.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금 많이 달라졌을것 같기도 하지만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가까운 사이었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을수 없었을것 같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 한국전쟁을 소재로한 영화를 통해 전쟁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배웠는데 시간이 되면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체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하면서 북한으로부터 대화의 자격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서명을 왜 거부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서명을 했다면 더 나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946년 북한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개혁을 했는데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무상분배해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집단적 사회주의 노동경쟁 운동인 천리마 운동으로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을 실시했습니다. 천리마는 천리를 가는 말이라는 뜻인데 열심히 해보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1965년에는 종파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근거로 김일성은 반대파인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숙청했습니다. 1972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으로 주체사상을 권고히 했고 김일성 독재를 강화했습니다. 북한의 역사는 중, 고등학교 시절 많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에서 북한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들었었는데 너무 시간이 지나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북한에 대해 말해주는 도서를 참고한다면 더 괜찮을것 같습니다.


12강 강의에서 캡쳐한 사진-휴전회담과 천리마 운동


대한민국은 통일 문제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장면 정부때에는 UN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하자고 말했지만 인구가 많은 남한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북한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을 1972년에 발표했는데 냉전체제 종식과 친하게 지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이념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1985년에 이산가족이 만나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UN에 남북이 동시 가입했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2000년에 6.15 남북 공동선언을 하며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고, 북한에 여러 지원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상에 다른 분야도 많지만 우리나라에는 수상자가 많지 않기에 더욱 반갑고 귀중한 수상이었던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2007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금강산에서 여행객이 피격당하고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으면서 북한과 관계가 나빳습니다. 연평도 포격당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정말 무섭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다행히도 큰 전쟁으로 까지 이어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2강 해방과 분단을 보고 가까운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볼수 있었습니다. 남은 13강도 집중해서 잘듣고 감상문을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