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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영상자료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제 13강 대한민국을 보고

하루만에 끝내는 한국사 13강은 가장 최근의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제 1공화국은 이승한 대통령이 집권한 시대로 이승만과 조병욱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3.15부정선거를 했습니다. 부통령 자리에 이기붕을 앉히고 싶었던 이승만은 밤중에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이 찍힌 선거표를 무더기로 올려 부정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밖에도 유권자를 협박하거나 투표권을 강탈하고 3-5인조 공개투표와 야당인사 참관인 축출등이 있었습니다. 12년동안 계속된 장기정권을 연장하고 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이 장면을 이길수 있도록 부정을 저지른것이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중, 고생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시위에 가담했고 8명이 실탄발사로 죽어 72명이 다쳤으며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는데 시체를 바다에 버린것이 발견되면서 4.19혁명이라는 전국민적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하야를 선언하고 화와이에서 여생을 마감합니다.


제 2 공화국은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윤보선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 받았는데 총리인 장면의 내각 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인 윤보선보다 장면이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처벌과 경제개발 계획 수립과 거창 학살 진상조사, 교원노조 활동 인정과 학원의 자율화등 국민의 각종 요구사항이 많았는데 일들이 원활히 해결되고 수행되지 못했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갈등을 빚으며 혼란기를 겪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입장에서는 대통령이지만 총리의 권한이 너무 쎄서 불만이 많을수 밖에 없었을것 같습니다. 적절한 선에서 윤보선 대통령도 권한이 주어졌다면 장면 총리와 갈등이 해소될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 3공화국은 박정희 정권이 1961.5.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시작됩니다. 4.19혁명 이후 제 2공화국이 국민의 청원과 바램을 잘 이루지 못하고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제2공화국이 1년이 채 안된 상황에서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대가 시작됩니다. 중앙정보부를 설치했고 책임자로는 김종필이 선임되었고, 농어촌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으며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살리려 했습니다. 제 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는 일본과 수교를 하지 않았는데 일본과 수교를 하면서 전쟁으로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았지만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이 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일본에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배상을 해야하는 문제를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우리 정부가 대신 피해자 개인에게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실상 잘 실행은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1964년 6.3 수교반대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맴버중에는 이재호, 이명박, 손학규 등이 있었습니다. 제 3공화국에서는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 졌는데 군인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경제성장을 했지만 베트남에서 군인들이 잘못한 점도 있기에 피흘린 대가는 감사해야 하나 잘못은 생각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베트남전하면 고엽제사건이 떠오르는데 밀림의 숲을 제거하기 위해 뿌려진 고엽제는 인체에 매우 해로워 지금도 고엽제 문제로 보상과 시위등이 일어나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라크전에 파병된 군인들은 돈을 많이 벌기는 하지만 목숨을 걸고 가는것이기에 베트남 파병에 동참한 군인들이 고생했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북한에 천리마 운동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새마을 운동이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비 농촌 지역까지 퍼지면서 나라가 부강해지고 잘 살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대통령과 젊은 새마을지도자와 정부 즉 공무원이 힘을 합쳐 이뤄낸 대한민국의 성장을 도운 운동이었습니다.


13강에서 캡쳐한 사진-4.19혁명과 5.16 군사정변


제 4공화국은 1972년의 유신헌법으로 대표가 되는데 북한과 통일을 하자는 의견을 빌미로 남한에 힘을 몰아주자는 주장으로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꿉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였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 박정희 대통령은 재신임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종신제라고도 말이 나왔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만의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다는것은 너무 불공평하고 국민의 뜻이 반영이 안되기 때때문 당시 사람들중 많은 사람이 인정하기 힘들었을것 같습니다. 제 4공화국 당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할 권리가 있어 입법권에도 힘을 가지고 있었고 헌법을 정지시키는 깁급조치라는 조항이 있어 사법권에도 힘을 가지고 있었고 행정권도 있었기 때문에 3권 분립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문제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는데 정치와 경제권을 가진 사람이 가까운 사이가 되어 문제가 있는 일을 말합니다. 서로 경계하고 가까워서는 안되는 일이 반대가 되면 문제가 있을수 있는것 같습니다. 이 시절에 YH여공사건이라 하여 가발을 만드는 곳에서 사장의 의도적으로 부도를 잃으켜 도망가고 직원들은 월급과 일자리를 잃을 상황이 옵니다. 김영삼은 야당 당사에 여공을 불러들여 시위와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주었지만 무장 경찰을 투입해 야당 당사에서 여공들을 강제 연행하면서 여공 1명이 사망에 이릅니다. 김영삼은 유신을 강하게 비판했고, 국민들로 부터 유신은 비난을 받을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는 김재규와 차지철이 있었는데 김재규는 조금은 온건파이었고 차지철은 극단적 강경파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더 신임하면서 둘이 갈등이 심해졌는데 유신 독재 정권 타파를 외치며 일어났던 부마항쟁을 수습하는 방법을 놓고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딪히다 김재규에 의해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임하고 밀어 주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수도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을 저격하는 일까지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힘들고 그 상황에 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아쉬운 일인것 같습니다.


제 5공화국에 들어서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자리를 대신 맡았는데 전두환 신군부의 반란이 1979.12.12에 일어납니다. 1980.5.17일에 다시 한번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살피고 있던 신군부는 반대파이자 경쟁자인 김종필과 김대중을 처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980.5.18 신군부 타도를 외치며 시민군이 결성되었던 광주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었기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신군부는 시위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는데, 목숨까지 걸고 저항하는 모습은 용기가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신군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를 만들었고, 언론사들을 관리하려고 보도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범죄를 줄인다는 표면적 목적이었지만 범죄와 상관없지만 신군부와 대립하고 싸운 사람들이 오기도 하며 불구가 되서 나가거나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에서는 여러 비난고 단점을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만회하려했고 교복의 자율화를 펼치면서 국민의 호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3강에서 캡쳐한 사진-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


제 6공화국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입니다. 이 시대에 선배를 숨겨주었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은 박종철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화 1987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인식했는데 박종철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책상을 쳤더니 죽었다고 말을 한것은 너무 티가 나는 거짓말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13 호헌조치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일체의 개헌 논의를 하지 않았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6월 항쟁으로 맞서서 독재를 타도하고 호헌을 철폐하려 했습니다. 이 때에도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처럼 계엄령을 내려 철권 통치로 6월항쟁에 대응하려 했지만 미국이 간섭하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6.29 선언을 통해 간선제가 직선제로 바뀌었지만 민주파 후회가 아닌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이 되면서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외교에 능통했지만 내부 정치에는 관심을 많이 두지 않으셨습니다. 중국과 소련과 수교를 했고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맞췄으며 부분적인 지방 자치제를 시행했습니다. 이후에 김영삼정권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어서 김대중대통령의 햇빛정책이 빛났고 이후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치가 있었고,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해 대통령이 대통령을 이어 갔습니다. 현재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남북 문제 해결을 잘 하면서 큰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역사란 예언서가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일어난 일을 나타내 주는 것이지만 역사를 잘 공부하여 왜라는 궁금증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앞으로의 역사는 좀더 나은 역사가 될수 있도록 해야할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하루만에 끝내는 제 13강 대한민국을 보고 내용요약과 느낀점을 써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유명한 설민석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보고 글을 써보겠습니다.